와인 강의하는 사회주의자 임승수

마르크스주의 책 쓰는 작가로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인생을 걸었다지만, 먹고사는 부분까지 좌파 활동에 전적으로 기대어서는 가정 경제를 지탱할 수 없다. 생계가 위태로워지면 가정이 흔들릴 것이고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지 않겠는가.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적이며 실용적인 고민이 요구되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내 작가 이력을 아는 이들은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쓴 작가가 뭐 그리 엄살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회과학 베스트셀러 판매량의 그 소박함과 단출함을 모르니 하는 얘기다. 15,000원짜리 책 팔면 10%인 1,500원이 작가 몫인데, 천 권이 팔린다 한들 인세는 세금 떼고 145만 원 정도다. 당신이 최근 사회과학 서적을 얼마나 구매했는지 떠올려 보면 나의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 지식 부스러기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환금성 있는 글로 바꿔야 그나마 생계가 유지될 텐데,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책 쓰는 것으로만 일관해서는 대책이 없다. 작가로서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11년에 <글쓰기 클리닉>. 2014년에는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글쓰기 및 책 쓰기의 노하우를 다룬 단행본 두 권을 집필해 생계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보편적인 관심사를 다룬 책이라 독자층이 넓은 데다가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강의 기회도 많았다. 덕분에 그 후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자본주의 할래? 사회주의 할래?> 같은 급진적 책들을 편한 마음으로 집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글쓰기 실용서의 약발이 다해가면서 새로운 먹거리 발굴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소재를 고민하다가 떠오른 키워드는 ‘취미’였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생계를 위한 노동 이외에 성취감과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취미생활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지는데, 그런 맥락에서 구체적 취미에 대한 글을 쓰면 어떨까 싶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2015년에 우연히 와인을 마시고 충격에 빠진 후, 없는 살림에 나름 진지하게 취미생활로 지속해왔다. 나 같은 사람도 와인에 빠질 정도면 와인 대중화가 코앞이라는 얘기인데, 의외로 와인 초심자를 겨냥한 대중적 에세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코로나 유행으로 집에서 혼술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와인 판매량이 급증하기도 해서, 와인 에세이를 쓰면 반응이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곧 오마이뉴스에 ‘임승수의 슬기로운 와인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와인 에세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서도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매번 주요 기사로 다뤄주었다. 덕분에 조회수가 상당히 높게 나왔는데, 와인 수입사에서 연락이 오고 와인 매장 직원이 나를 알아볼 정도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조만간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가 오겠다고 예상했는데, 이상하리만큼 단 한 건의 연락도 없었다.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일단 와인 도서 판매량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이 떠올랐다. 출판사에서는 시장성을 파악하기 위해 기존 와인 도서의 판매량을 살펴볼 텐데, 인터넷 서점의 와인 도서 판매지수를 확인하고 실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내가 단순한 와인 애호가라는 사실이다. 와인 책 저자 경력으로서는 부족하고 취약하다. 아마도 이러한 연유로 출간 제의를 주저하지 않나 싶었다.

기존에 함께 작업했던 출판사에 제안하는 방법도 있지 않냐고? 나로서는 조심스럽기도 하고 내키지도 않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나는 와인 전문가도 아니고, 와인 분야는 책 판매가 활발하지도 않다. 기존에 인연을 맺은 출판사에 제안하면, 그쪽에서 이래저래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이미 좋은 관계를 형성했는데 굳이 불편해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설사 그런 식으로 와인 책을 계약했다손 치더라도, 나로서는 상대에게 신세 졌다는 부채감을 면하기 어렵다. 민폐 끼치는 것, 신세 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내 성격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어서 생면부지의 출판사에 무작위로 투고해서 계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나의 와인 연재글 자체에서 출간 의미와 상업성을 발견하는 출판사를 만난다면, 쿨시크한 비즈니스 관계로서 작업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연재 글에 대한 독자 반응도 좋으니 그때그때 한두 곳씩 투고하다 보면 금세 출판사로부터 긍정적인 답장을 받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매주 출판사 몇 곳을 골라 투고 메일을 보냈는데, 며칠 후 어김없이 거절 메일이 오는 것 아닌가.

원고 투고에 감사하나 출판사의 방향과 맞지 않아 아쉽다는 판에 박힌 거절 메일을 연이어 받다 보니, ‘내 글이 그렇게 별로인가?’라는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역지사지해 보면 이유는 명확했다. 와인 전문가가 공들여 쓴 책도 판매량이 고만고만한데, 초짜 애호가의 출간 제안이 반가울 리 있겠는가. 게다가 네이버에 임승수라고 검색하면 마르크스주의 책 쓰는 작가임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뜬금없이 와인 원고를 들이미니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잇따른 거절 메일에 의기소침해진 때였다. 마침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라 아이들과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방문했다. 숲속의 미술관은 마치 동화 속 공간 같았다. 그 분위기에 젖어 해맑게 뛰노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흐뭇했는지, 미술관 관계자분이 아이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었다. 행운의 상징인 네잎클로버! 그런데 인생 참 재미있다, 한동안 거절 메일만 오다가 네잎클로버 득템 후 무려 출판사 네 곳으로부터 계약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중 가장 먼저 제안한 수오서재 출판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이게 네잎클로버의 영험함 덕분이라고 생각할 만큼 철이 없지는 않다. 그럴 나이도 아니고. 사실은 그즈음 투고 방식을 바꿨다. 거절 답장만 받으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이를 악다물고 수십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투고했다. 그러자마자 출판사 네 곳으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은 것이다. 우연히 시기가 겹쳤을 뿐. 수오서재 출판사는 나의 와인 관련 경력이나 책의 시장성을 따지기 이전에, 오로지 글이 흥미진진해서 계약을 결정했다고 한다. 작가로서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와인 애호가의 좌충우돌 경험담을 담은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이 출간되었다. 애호가 나부랭이 주제에 와인 책을 낸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출간 후 반응도 좋아서 상당히 오랫동안 와인 도서 분야 판매 1위를 기록했다. 판매량이 많은 분야는 아니지만 생계에 쏠쏠하게 보탬이 될 정도로 인세가 들어왔고, 이 책을 계기로 다양한 곳에서 와인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예상외였던 곳은 법무연수원이다. 검사, 검찰수사관, 교정직 공무원, 출입국관리직 공무원, 보호직 공무원, 공익법무관 등을 교육하는 국가기관인데, 좌파 사회주의자로서는 이래저래 어색하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곳에서 검사들을 대상으로 와인 강의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사회주의자와 법무연수원의 조합이 가능했을까?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대구의 한 동네 책방에서 와인 강의를 했는데 참가자분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책방 주인과 친분이 있는 검사가 마침 법무연수원 교수로 부임했는데, 교육과정을 짜는 과정에서 책방 주인으로부터 내 와인 강의가 상당히 재밌다는 얘기를 듣고는 섭외한 것이다.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 검사와 나눠보니 이미 내 정치적 성향을 알고 있었다.

“검사 대상 강의다 보니 작가님 입장에서는 좀 불편하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요. 일부 정치 검사들이 문제이지, 검사님들 대부분은 나쁜 사람들 벌주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와인 강의를 하는 거라, 정치적 얘기를 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젊은 검사들이 좌석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마음가짐으로 강의했는데, 평가가 상당히 좋았나 보다. 검사 교육 외에도 법무연수원에서 진행되는 수사관, 교정직 공무원 등 다른 직군 교육에 계속 초청되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한 신임 검사는 와인 강사로 들어온 나를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에 나에게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들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긴, 마르크스주의 강의와 와인 강의를 동일인이 하는 경우는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법무연수원에서 검사 대상으로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도 해 보고 싶은데, 법무부 조직이 워낙 보수적이라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제안이라도 해 보고 싶다. 동네 도서관에서도 하고 고등학교에서도 하는데, 법무연수원이라고 못 할 거 있겠나. 대한민국 검사가 법무연수원에서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를 듣는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일보를 상징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와인이야말로 진정한 좌우합작이다. 얼마 전에는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에서 와인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동지들과 와인 얘기를 나누니 한층 각별한 느낌이 들었으며, 코로나 방역 완화로 음식과 와인을 체험하며 강의할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안주로는 보쌈, 주꾸미볶음, 와인으로는 매콤한 음식에 잘 어울릴 리슬링(화이트 와인)을 선택했다. 보건의료노조 간부가 말하기를, 내가 보쌈과 주꾸미볶음을 준비해달라고 했을 때 의아했단다. 와인 안주로 치즈 같은 것을 예상했나 보다. 와인 강의를 하면서 강조하는 사항이 있다. 와인에 음식을 맞추지 말고, 우리가 자주 먹는 음식에 와인을 맞추자! 와인은 특별한 술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소주나 맥주처럼 반주로 영접하자는 의미다.

매콤한 한식과 리슬링의 조화가 놀랍도록 맛있다며, 불콰한 얼굴로 다들 감탄사를 연발한다. 술을 잘 안 마시는 간부도 오래간만에 꽤 많이 마셨다며 놀란다. 마지막 건배사는 ‘노동해방을 위하여’였다. 이 세상 어떤 와인 강의에서 이런 건배사가 나올까? 한 병에 이만 원 정도 하는 와인으로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면, 제대로 남는 장사 아니겠나. 사회 변혁운동을 하는 이유는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인데, 적어도 민주노총에서의 와인 강의 시간만큼은 그 목표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이러니 어떻게 사회주의자로서 와인을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임승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