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87년이냐 91년이냐

햇살 이해수 2018. 11. 20. 13:16


권경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1991년, 봄>이 영화관에 걸렸다.

민주주의와 민중해방을 외치며 10명이 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이른바 유서대필이라는 황당무계한 이유로 강기훈이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1991년 5월과 그 후의 이야기들을 담은 영화이다.

당시를 몸소 겪고 기억한 분들은 도저히 이 영화를 보러갈 용기와

엄두가 나지 않으실 수도 있겠다.

나도 힘겹게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던 그날들의 기억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이

너무 두려워 한참을 주저한 끝에 가방 속에 소주 두병을 숨겨서 겨우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가서 보시라.

영화는 우리를 고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그 시절을 겪으며 아물지 못한 상처를 마음에 지고 살게 된 이들은

극장을 나올 때 후련하면서도 정제된 마음으로 영혼의 ‘대속’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아야 할 이유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87년 항쟁의 신화’를 깨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신화는 다음의 내용을 골자로 한다.

독재와 파시즘 체제는 87년 6월의 대항쟁으로 무너졌고 바야흐로 민주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시작되었고 통일운동이 터져 나왔으며 자주·민주·통일의

이상을 전면에 내건 민주화 세력이 등장했고, 이들이 사회를 실제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비록 수구 기득권 세력이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이러한 사회 변혁을 가로막았지만

이 민주화 세력은 굴하지 않았고, 일진일퇴의 씨름을 벌이면서 몇 번의 정권 교체를 통해

힘겹게 그 혁명을 계속 밀고 나가 왔다.

그리고 그 절정에 재작년의 ‘촛불혁명’이 있었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87년의 이상을 점차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시대의 원년은 87년이며, 우리는 포스트 87년의 30년간을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특히 지금 50대에 들어선 ‘86세대’의 신념으로 굳어져 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86세대’의 ‘자뻑’이 만들어낸 날조된 역사일 뿐이다.

87년 혁명은 시작되자마자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렸다.

바로 그해 12월, 대통령에 눈이 먼 김대중·김영삼 두 후보가 민주 세력의 표를

거의 정확히 두 쪽을 내버리는 바람에 독재 정권 타도라는 87년의 열망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후 이름도 없는 무수한 학생들, 노동자들, 시민들이 ‘민족, 민중, 민주’라는

87년의 이념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눈물겹게 헌신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세를 불려가는 반동 세력과 당리당략에 몰두하는 제도 야당의 작태 속에서

그 모든 노력은 좌절과 정체를 면치 못하였다.

실질 임금 상승과 더불어 본격화된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의 물결이 사회를 덮으면서

대중들은 ‘민족민주운동 세력’에 대해 피로감과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타성과 자기만족에 젖은 운동 지도부는 이러한 상황 변화에 거의 대처하지 못하고 무능력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좌절과 안타까움의 끝에서 1991년 5월이라는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91년 6월의 선거는 여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으며,

8월 말에는 소련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였고,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헬조선’은 이때 시작되었다. 스스로 ‘원로’를 자처하며 아무 근거도 없이 분신에

배후가 있다고 ‘설레발치던’ 지식인들의 행태도, 엽기 소설에나 나올 악마적 상상력을

그대로 현실화시킨 언론과 법조계의 환상의 팀플레이도, 선거 승리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는

한심한 ‘민주’ 정당도, 교수 한 사람이 밀가루를 뒤집어쓴 선정적인 사진 한 장에 미쳐 날뛰는

 ‘여론’이라는 것도, 진실이고 정의고 뭐고 ‘내 편’에다가 몰표를 던지는 묻지마 투표 행태도,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과격성으로 일관하는 운동권 지도부의 무능력도 모두 이때 나타났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수 고 조동진이 95년 노래했던

‘친구들에게’의 가사처럼.

“우리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 / 꽃잎 날리던 그 허기진 언덕 위에서 /

우리 말하던 사랑과 자유 / 이제 아무 의미 없어도”

박근혜와 보수의 몰락 후 이제 자신들이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고 믿고 있는 ‘86세대’는 이 영화를 꼭 보시라.

87년의 혁명이 91년에 어떻게 소멸했는지 기억이 살아날 거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자신들이 어떻게 세상에 타협했고 또 어떻게 더 끔찍한 자본주의를

만들어 갔는지가 또록또록 기억날 거다.

그래서 2018년의 세상은 영광스러운 87년의 연속이기는커녕 헬조선의 씨앗이 뿌려진

91년의 연속이라는 점도 느껴질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오늘날의 이 끔찍한 야수적 자본주의에 고삐를 채우는 게

이제부터 할 일이라는 점도 느껴질 거다.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 홍기빈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