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관하여

햇살 이해수 2018. 5. 18. 07:26


윤상원 열사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도청에는 300여명정도 사람들이 있었는데 윤상원 열사가

여자들과 고등학생들 불러 모아놓고 말한 내용이다.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다짐한 150명은 총을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27일 새벽 무장전사들은 대부분 건물 앞에 배치되었으나

계엄군 특공대는 뒤에서 기습공격을 하였다. 

윤상원 열사는 대항하기 위해 복도로 나오다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광천동 천주교회 내의 들불야학당.


상원은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씨의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노동야학을 이끈다.

그는 야학을 통해 성숙한 운동가로 자라났다.

6.29 교육지표 사건으로 강제 휴학 당한 뒤 노동운동에 헌신해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씨는 78년 겨울에 연탄가스로 숨진다. 


‘노동자 누이’ 박기순열사, 들불강학의 삶 (1957∼1978)

82년 두 사람은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5.18묘역에 함께 누워있다.
그리고 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서, 5.18 당시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으로서

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다 계엄군의 총칼에 숨진

윤상원(당시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씨와 79년 노동운동을 하다 숨진 전남대 휴

학생(국사교육학과 76학번) 박기순씨의 영혼 결혼식이 치러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결혼식에 사용된 15곡 가운데 하나로 말미를 장식하는 노래였다.


묏비나리


(상략)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하략)
  - 백기완 -

가사는 소설가 황석영씨가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80년 12월)을 개작했다.
그리고 곡은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종률씨가 붙였다.
그는 1979년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란 노래로 은상을
탔을 만큼 음악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패들은 황석영씨의 집에서 카세트 레코더를 이용해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한다.

이 테이프가 여기저기서 복제되는 한편 처음엔 운동하던 사람들,
나중에는 민중들의 입을 통해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 임을 위한 행진곡 』은 80년 5월 광주를 추모하기 위해 불려진 노래다.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다’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연설 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임을위한행진곡 / 서영은



【 들불야학 7열사의 삶과 죽음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기순
(1958~1978.12)
전남대 학내 사건으로 무기 정학을 당한 뒤 78년 여대생 최초로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그리고 들불야학의 창립을 주도했다. 야학 일로 며칠 밤샘을 한 78년 12월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을 거두었다. 82년 6월 윤상원 열사와의 영혼결혼을 기리는 창작노래극에서 김종률이 작곡하고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노랫말로 고친 ‘님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불려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윤상원(1950~1980.5)
대학을 졸업한 뒤 다니던 서울 직장을 던지고 광주에 내려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들불야학 강학으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5월을 위해 태어난 인물’이라 한다. 그만큼 항쟁 전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컸다. 수습위원회의 ‘총기반납’ 주장에 대해 항쟁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마지막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청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용준(1956~1980.5)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버려졌고 성장과정도
가출과 고학의 연속이었다. 73년 광주 YWCA신협에 수금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김영철과 형제의 연을 맺었다. 그 인연은 다시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그리고 들불야학으로 이어졌다. 워낙 필체가 좋고 속도가 빨라 항쟁기간 투사회보 제작에서 전문 필경사 역할을 했다. 항쟁 마지막날 새벽, YWCA를 지키다 생을 마감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관현(1953~1982.10)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법대생에서 광주공단실태조사에 나섰다가 들불강학으로,
그리고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항쟁의 불을 지폈다. 5·17 계엄직후 수배생활 중에는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2년 가까운 도피생활을 하다 붙잡힌 뒤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오월항쟁 진상규명과 교도소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쳐 40여 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다 운명을 달리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신영일(1958~1988.5)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중 무기정학을 당한 뒤
박기순 등과 들불야학 준비 팀에 합류한다. 들불야학 학당가를 직접 작사·작곡할 정도로 창립 초기부터 적극적이었고, 국사 담당 강학으로 활동했다. 오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 재건에 매달렸고, 광주지역 청년운동에 헌신했다. 고문과 부상, 단식투쟁의 후유증, 피로 누적으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철(1948~1998.8)
지역 명문이었던 서중·일고를 나왔으나 가난한 탓에 공무원이 됐다.
그러나 공직비리에 염증을 느껴 소외받은 삶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고, YWCA신협과 인연을 맺는다. 77년 광천동시민아파트에 입주해 ‘주민운동’을 하던 중 들불야학과 만났다. 항쟁지도부의 기획실장으로 도청에서 저항하다 체포됐다. 이후 고문후유증으로 그의 의식은 98년 죽는 순간까지 ‘광주 5월’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박효선(1954~1998.9)
79년 여름, 야학 학생들과 연극작업을 하면서 문화담당 특별강학으로서
들불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극회 ‘광대’를 꾸리다 80년 오월항쟁에 투신, 도청지도부 홍보부장으로서 항쟁을 이끌었다. 3개월 여의 옥고와 20개월간의 수배생활을 청산한 뒤 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단,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희의 오월> <모란꽃> 등 오월을 주제로 한 작품활동에 천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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