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탈출기 1
장맛비가 깐작거리던 밤,
꽤나 늦은 시간에 추억 하나가
그 산란한 밤 속으로 나를 찾아왔다
소주 한 병을 앞에 두고
서로를 보듬어 주던 옛정에
맞장단을 칠 때쯤 목소리가 큼큼거렸다
그건 혼자가 된 신념 때문이 아니고
널 잊지 않으려는 집착 때문도 아니고
소주 한잔이 목에서 글겅이고 있는 탓이다
누군가를 믿으려면 믿지 않는 법을 알아야 하고
누구를 떠나 보내려면 잊지 않는 법을 알아야 하고
슬픔을 사랑하려면 외롭게 웃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말장난 같은 말들을 가만히 앉아서 보다가
울컥 두 눈이 흔들거린다
서글픈 웃음은 빈 가슴과 입 맞추고 있다
겨우 소주 반병에 속내를 꺼내 놓고
더는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사람과 사랑에 나처럼 긴 실패와
너처럼 멀어진 약속에 너그러워진다
내가 잠시라도 너그러운 것은
아직 눈시울이 뜨거울 수가 있고
아직 가슴이 우둔운둔 뛸 수가 있고
저렇듯 해야 할 일을 수북히 쌓아 놓고
날 기다리고 있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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