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전곡리를 지나면서

햇살 이해수 2021. 9. 20. 13:21

쌍코뿔이에게 쫓긴 네가

우리 동굴로 황급히 뛰어들었을 때

나는 뗀석기로 발라 낸

털매머드 살코기를 장작불에 구워

늦은 아침을 먹던 참이었다

할아버지께 손 쓰는 법을 사사 받았고

아버지한테는 바로 서는 법을 배웠던

나 같은 동굴뜨기 원시인의 눈에는

너는 설설고사리처럼 늘씬하고 어여뻤다

 

자기네 동굴인류가 만든 주먹도끼가

세계 최고라고 뽐내던 모비우스는

우리가 오래 전부터 사용해 왔던

전곡리 주먹도끼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이용해 벽에 시 나부랭이를

휘갈겨 써대는 방안풍수 글품쟁이였고

산너머 동굴의 무녀 딸이라던 네가

장쾌한 재인폭포 앞에서 춤을 출 때면

넌 한 마리의 우아한 두루미였다

 

‘행복은 짧고 고독은 길다!’는

딱한 아포리즘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연인과 광인과 시인은

가위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무외의 수사마귀식 사랑 같은,

일그러진 도그마의 파편 같은,

상상력을 앞세운 편집광 같은,

어쨌든지 생은 자신의

우졸을 질타하는 탄식의 연속이 아니던가

 

아아!  바보 같는 나여

오, 수수만년 그리운 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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